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군사적 이유 === [[고구려]]의 전쟁 역량은 아무리 고구려가 다년간 전쟁으로 피폐했다 하더라도 말갈이나 돌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고, 당나라도 고구려의 후방이 [[백제]]와 [[신라]]로 나뉘어 있을때는 문자 그대로 국운을 걸고 침공해야 했다. 기록들을 토대로 보면 모든 나라가 고구려의 무기나 병사, 지휘관 등을 우수하게 평가하면 평가했지 약하거나 부족하게 평가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수서, 북주서, 위략, 만염집 등 참조.)[* 백제가 弓 箭 矛 刀 4가지의 무기를 사용할 때 고구려는 활, 창, 폴암, 검 종류에서만 최소 8가지를 (弩 弓 箭 戟 削 矛 鋋 刀 劍 貊弓 貊劍) 운용했다. <수서>에는 고구려군의 무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兵器與中國略同(병기가 중국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 또한 고구려는 야전과 공성전 양 쪽에서 노와 활을 애용했다.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尒)도 [[고구려#s-7|고구려군]]의 流矢(류시)에 자주 당했다고 <구당서>에 나오며 염비(閻毗)도 요동성 전투에서 고구려 요동성 수비군이 弓弩(궁노)를 亂發(난발)하자 타고있던 말이 流矢에 맞았다고 <수서>에 나온다. 활도 고구려 초기에는 단궁류를 많이 쓰다가 6세기를 즈음에 이르러서는 장궁류를 많이 썼으며 이를 통해 기병중심에서 보병중심으로 전환했다고 보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다만 이세민, 이세적, 장손무기, 아사나사이, 이도종, 이세적, 설인귀, 소정방, 학처준, 정명진, 계필하력같은 당의 1급 장군들에 비하면 고연수, 고혜진, 뇌음신, 생해, 연남생, 연남건같은 고구려의 장군진들은 모자라지는 않으나 이들을 이기기에는 부족한 감이 크며 실제로도 1차 전쟁의 [[요동성]] 전투에서 드러나듯이 고구려는 다른 당의 장군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다가도 위에 언급한 당의 1급 장수들이 나타나면 패하는 루틴을 반복했다. 물론 지리멸렬하지는 않고 그 이세민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정도로 저력을 발휘하긴 했으나 전투의 결말은 패배로 끝났다. 1차 전쟁 당시의 [[주필산 전투]]나 2차 전쟁당시 [[안시성]] 근방의 전투처럼 [[고구려#s-7|고구려군]]은 이 1급 장군들이 이끄는 군대에게 야전을 걸어서 분명 승리를 목전에 두거나 유리한 고지를 점했으나 꼭 한 수 차이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패하였다.] 특히 고구려가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의 규모도 중국 통일 왕조에 비해 작았을뿐 알고보면 상당히 많았다. 훗날 발해의 [[무왕(발해)|무왕]]이 당나라를 침공할때, 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고구려도 '''30만'''의 강병(强兵)으로 당에 맞서다가 패배하였는데 발해의 군사력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므로 승산이 없습니다' 라고 발언하며 당나라 공격을 만류한 바가 있다.[* 참고로 대문예는 당시 국경지대의 수비군 사령관이었다.] 즉 고구려는 적어도 평시 상비병력이 30만이라는것이 확인 될 수 있다는 점으로서도 작용하지만 그정도로 체계화된 정규군을 상시보유하고 있었다는 얘기는 당시 왠만한 몇 안되는 강대국들 아니면 그정도 중무장한 정규 상비군 규모를 운용하고 있는 나라가 없었고 동아시아 한정으로는 [[당나라]] 말고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를 참고해서 고구려의 병력동원능력을 동 시대 및 후대의 한민족의 왕조국가들과 비교하자면 아예 선군도감을 두고 전국에 44개의 선군사를 두어 작정하고 20만~30만 병력 상비병력으로 모은 고려를 제외하고는 비교할 만한 국가가 없다. [[신라]]의 경우는 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연구해서 만든 논문을 보면 황산벌 전투에서 동원한 약 50,000의 병력이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서부전선의 병력까지 상당수 차출해서 끌어모은 병력이고[* 신라 주력군이 백제 전선에 몰려있던 660년에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인 술천성, [[북한산성]], [[칠중성]] 등에는 고구려군의 빈집털이를 막을 최소한의 병력과 김춘추가 직접 뽑은 [[필부]], [[동타천]] 같은 인재를 배치해 두었지만 방어군이 소수다보니 상당히 고전한다. 이 중 북한산성은 2,800명이 지켰다고 하는데 남녀노소 다 끌어모아 싸웠다고 한다.] 백제는 한 번에 40,000명 정도 밖에 동원하지 못했다. 반대로 고국원왕과 광개토대왕 시기의 [[고구려#s-7|고구려군]] 5만은 고구려에게 있어서 큰 비중을 지녔으나, 당나라와의 전쟁에서는 신성과 국내성, 단 두개의 성에서만 40,000명을 동원하였고 중앙군은 15~20만[* 1차 주필산 전투 및 3차 고당전쟁기 금산전투]이 넘는 대병력을 동원하여 영내에서 야전을 치루는 저력을 선보였다. 당나라와의 마지막 전쟁에서는 전투 한 번에 최소 수만이상의 병력을 동원하고 패전 한 번에 30,000명, 50,000명을 상실해버릴 정도로 그 규모도 대륙급으로 커졌다. 게다가 당의 강력한 경기병도 전면전에서는 고구려에게 효과적이지 못했다. 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당나라군|당군]]은 요동도행군 부도총관 이도종이 [[요동성]] 외각에서 경기병을 중심으로 한 4,000명의 기병으로 고구려군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은 뒤로 물러나며 받아치다가 역습을 하는 방법으로 절충도위 마문거가 선봉으로 나선 이도종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뒤에서 오고 있던 행군총관 장군예의 부대까지 공격해서 무너뜨리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나라군|당군]]이 요동성 외각의 [[고구려#s-7|고구려군]]과 싸워 이긴 것은 또 다른 행군총관 이세적이 합류한 뒤의 일이다.[*출처: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p128, 김용만 저] 일부에서는 수와 당의 부병제의 위력이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일단 간단하게 수, 당의 부병제를 설명하자면 개병제와 모병제의 절충안으로 전국의 가호에게 국가에서 토지를 지급하거나 소유권을 확립시키는 대신 '''평등하게''' 병력을 차출하는 제도다. 괜히 방효태가 사수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지방 향리 자제들이 다 죽었는데 내가 어딜가냐고 한탄한게 아니라는 것. 수나라는 나라를 이렇게 전국단위로 고구려 원정에 갈아넣다가 국가를 망가뜨렸고 뒤이은 당나라 역시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국력을 대차게 갈아먹는 바람에 신라, 토번과의 전쟁에서 고전했으며, 고구려와는 전혀 상관없는 당의 서북지역에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와야 했을 정도로 기미체제가 붕괴하고 말았다.[* 물론 완전히 붕괴된건 아니지만 이것을 시작으로 점차 무너지게 된다. 당장 고구려를 멸망시킨지 30년도 안되어 만주에서 다시 [[발해]]가 탄생하고 중원을 공격한다.] 당이 [[요동성]] 전투나 [[주필산 전투]] 등지에서 드러나듯이 자기 역사를 왜곡해서 넣은 덕분에 제대로 알긴 힘들지만 1차 전쟁에서 [[요동성]]과 [[백암성]]에서의 야전이 있었고, 2차 전쟁 당시엔 김인문 열전에도 "고구려인들의 저항이 매서웠고 오히려 당군이 보급에 문제가 생겨 위기에 빠졌다."라고 나와있다. 더군다나 662년 시점에서는 누방 도행군 지휘자인 정명진과 부장 양사선, 패강 도행군의 지휘자인 임아상의 사망이 확인된다. 당나라 35군을 편제한 6개 도행군 가운데 2개가 사령관을 잃고 1개는 무력해지며 2개는 전선을 이탈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사수로 나아가 방효태의 당군과 대회전을 펼쳐 전멸시켰다. 일부 사람들이 고구려는 야전에서 수와 당의 군대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론 아니며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도 반박이 가능하다. [[고구려-수 전쟁]]부터 침공군은 수륙 양면으로 정공법, 소모전, 기동전 등 여러가지를 기획해서 적용했었다. 정공법으로는 요동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소모전을 시도하는 650년대에는 대체적으로 서북쪽 거란 방면으로 큰 재미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침공군의 주력이 요동 일대의 방어선을 우회해서 평양을 직공하는 방법을 쓴다면 1차적으로 고구려 중심지가 전장이 되는건 피할 수 없었다. [[고구려-수 전쟁]] 때부터 10만 단위의 수군의 직공을 당해온 고구려가 이러한 문제점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10,000 단위의 상륙을 저지하거나, 10만 단위의 대병력은 상륙 후 타격하는 식으로 대처하였지만[* [[고구려#s-7|고구려군]]은 [[압록강]] 및 [[오골성]], [[평양성]] 일대에서 수나라군과 맞섰고, 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에도 장량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은 고전하여 전후에 문책당했으며, 2차, 3차 여당전쟁 때 역시 압록강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선전하기도 한다. [[연남생]]은 깨졌지만 그래도 [[글필하력]]이 철수하며 어찌어찌 전략적인 목표는 달성되었고, 3차 전쟁 당시에 남건은 그래도 [[한반도]]에 돌입한 풍사본, 이세적을 압록강에서 막으며 해를 넘겨 버텼다.] 요동방어선을 온존하면서 수십만 단위 대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수준의 방위력은 가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변 일대의 국제 정세와 전투도 660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에 불리하게 흘러갔다.''' 적봉진, 토호진수 등에서의 전투 등으로 당나라는 내몽골에 자리잡은 고구려의 거점을 위협했으며, 그런 와중에도 서돌궐, 위구르, 거란, 해 등을 제압한다. 또한 나당 연합군을 거병하여 고구려의 남쪽 전선을 책임지던 백제를 멸망시키는데까지 성공한다.[* 당나라는 수륙 양면으로 10만 단위의 대전을 벌일 능력이 되었지만 고구려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게다가 고구려가 [[7세기]] 초반에 북방에 손을 놓고 있던 사이에도 [[당나라]]는 북방 민족들을 하나둘씩 제압해나갔으니(...)] 또 남부 전선의 방어 체계는 한성을 기반으로 한 방어 체계가 요동 방어선에 비할만큼 강력했는지 회의적이며, 그 결과 [[신라#s-13|신라군]]이 2, 3차 전쟁 때 평양까지 올라오는 결과도 초래했다. 신라군과 교전한 고구려군의 규모는 당나라와의 교전에서 10만 단위를 넘었던 것과 같이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2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김유신]]이 남쪽 전선을 뚫고 평양성으로 진격한 후 후퇴할 때 고구려 측에서 병력들을 소집해 추격하여 과천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김유신은 1만의 [[쇠뇌]]병을 활용해 기선제압을 했고 이후 총 공세를 퍼부어 그 결과 [[고구려#s-7|고구려군]] 1만 명의 목을 베었고 소형 아달혜(阿達兮)를 비롯한 5천여 명의 포로를 사로 잡았으며 1만이 넘는 병장기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때 신라가 전공으로 내세운 것을 보면 사로잡은 [[고구려#s-7|고구려군]] 지휘관이 겨우 소형(小兄)이라는 것이 그 증거인데 당시 소형은 고구려 관등 중 10위에 불과한 벼슬로 1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당주(幢主)에 해당되기 때문.( 출처-김용만 저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版 (2003년)] 사실 당의 국력을 생각한다면 고구려는 '''능력 이상으로 잘 싸운 것이다.'''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f0078768_4cf641f772db7.jpg|width=400]] 고구려의 안정적인 병력 및 물자 공급지역은 요동-송화강 유역-두만강 이북 지역(북간도라고 불리기도 하는 상경용천부와 중경현덕부, 동경용원부가 위치한 지역)-[[국내성]]과 그 인근(압록강 유역)-평안도(대동강과 청천강 유역)-함흥 평야 일대-황해도(재령 평야)-경기 북부이다. 70년 전후로 대륙의 통일세력과 긴장과 전쟁을 반복하고 마지막에는 대규모로 항복하거나 함락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은 가구 수가 69만 호로 추정된다.[* 대략 300~400만 정도로 추정된다.] 송화강 동쪽과 연해주 지역[* 송화강을 경계로 서쪽은 정주민족인 고구려인이 더 많았던 걸로 추정되고, 그 동쪽은 말갈7부를 비롯한 말갈계가 더 많았다고 추정된다. 단, 최소한 속말과 백산말갈과 같이 송화강 바로 동쪽에 붙어 있었던 족속은 고구려인에 동화된걸로 추정된다.]은 고구려 영토일지언정 감자도 고구마도 옥수수도 없던 시기에 인구가 많긴 힘들다. 당시 백제는 금강 유역이 중심이었고 노령 이남[* 오늘날과 같은 간척지가 생기기 전인것과 모내기로 쌀농사하기 전인 것도 감안해야 한다.]은 완전히 복속한지 얼마 안되었던 땅이라 신뢰도가 그렇게까지 높진 않았다. 신라는 경상도 외에는 병력 차출이 그리 크지 않은 강원도 남부가 사실상 전부였고 그나마도 관산성 전투 이후 편입한 구 가야 지역인 경상도 서남부는 대야성이 뚫리기 전까지는 기능을 했었을련진 몰라도 이후에는 안정적인 병력-물자 파밍지역으로 기능하긴 힘들었다. 충북과 경기 중부, 경기 남부도 마찬가지. 기록상에서 평원왕이나 영양왕 때의 기록을 본다면 고구려는 신라 땅을 잘만 건너서 백제를 치기도 했으며 629년에는 충북 청원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낭비성을 신라가 김유신이 가서 함락시키기도 하였고 온달도 충북 단양에서 전사했다는 설이 유력한 학설에 있는 등, 진흥왕의 북진 이후 일반적으로 인지되던 임진강 - 원산·안변 간의 고구려-신라 간 국경보다 한참 남쪽에 있던 곳들에도 고구려 세력의 존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바다 건너 대륙과의 교통을 위한 당항성과 주요 거점들을 제외하면 안정된 병력-물자 파밍 지역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신라가 나중에 설치한 9주 5소경만 보더라도 백제나 신라 지역들은 행정구역도 오밀조밀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구 고구려 지역들인 한주, 삭주, 명주는 그에 비하면 훨씬 광활하며 중심도시도 한주와 삭주의 남쪽 경계선에 각 하나밖엔 없다. 이는 인구도 별로 없고 개발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현대를 보더라도 개발이 제대로 되고 인구가 많은 지역은 행정구역이 오밀조밀하게 구성되어있고 행정구역의 등급도 높다. 그러나 인구가 적은 지역은 광활하고 행정구역의 등급도 준주 등으로 낮았었던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경기도에 비해 함경도 크기를 대비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신라의 주 이름에서도 그것이 드러나는데, 외국이나 이후 시대의 예를 보더라도 삭주, 명주계통의 행정구역명은 보통 변방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중국만 하더라도 삭주는 그것이 처음 지도에 제대로 나오는 [[위진남북조시대|위진남북조]] 시절에는 장안과 가까운 내몽골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주의 경우 지금이야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이 되어 인구가 많지만 이 시대까지는 --삼국의 치열한 전쟁터--변방이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한강 하류 유역은 '''늪지대'''에 가까웠다. 사실 한강뿐만 아니라당시 삼국의 하천 자체가 이런 경우가 제법 있는 편이었다. 요하 하류도 요택이라 불리며 수나라를 곤란하게 했다. 다만 요동을 비롯한 서한만 지역의 하천은 고조선-한사군으로 대표할만큼 과거부터 개발이 시작된 곳이라 상대적으로 더 나았을 수는 있다. 더군다나 현대에는 넓은 개활지인 부천, 일산 등은 홍수만 났다 하면 물이 빠지지 않는 곳이라 늦게는 1910년대에야 간척이 시작된 곳도 있다. 후기신라시대 집터가 풍납동, 천호동, 벽제 같은 곳에 있는 이유도 한강이 범람 안 하는 곳이기 때문. 또한 신라가 이 지역을 점유하고도 백 년 이상에 걸친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계속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키면서 개척에 노력했던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참고로 왕건의 세력이 규합한 송악은 한강-임진강 범람원이 아닌 예성강을 거슬러올라간 곳에 있다.] 이런 안정적인 팜 지역들을 가진 고구려이기에 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요동성]]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성]] 단독 또는 국내성과 신성에서만 4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백제나 신라에선 관산성 전투에서 보듯 3만만 하더라도 큰 병력이고 4만 병력은 '''정말로 온 나라를 쥐어짜야 낼 수 있었던 병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고구려의 국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 660년에 백제를 침공했던 나당연합군의 [[신라]]군의 경우 5만 명이 약간 안되는 병력을 동원했는데, 이 병력은 [[당항성]]을 비롯하여 고구려쪽 국경 병력을 제외한 신라가 투입할 수 있는 야전병력의 거의 전부나 다름이 없었다. [[백제]]는 [[대성팔족]]의 힘이 강해 삼국 중에서도 특히 왕권이 약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관산성 전투]]에서 3만여명을 동원한 것이 기록된 최대 병력이었다. 그나마도 이건 [[왜]]와 [[대가야]]의 연합군이라 이들을 제외하면 더욱 줄어든다. 하지만 수, 당은 고구려가 가진 병력-물자 파밍지역보다 몇 배는 많은 안정적인 내수가 존재했으며, 그 덕에 잠시동안 이민족과의 분쟁에 대한 대응 수단을 잃는 댓가로 그 모든 전력을 단일 전선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반대로 고구려는 후방에 언제나 완전히 문명화된, 언제나 잠재적 위협인 국가들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강력한 보복을 가할 수 있는 절대 강자의 위치에는 있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과의 전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와 왜의 패전 이후 후방을 대신 견제할 세력이 없어진 것이 결정적인 전략적 패배로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